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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서 현대로 문화가 교차하는 도시 나가사키.

(https://colbase.nich.go.jp/collection_items/kyuhaku/A136?locale=en)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 나가사키 항.이곳이 예로부터 서양과 연결되는 항구도시였다고 들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산, 바닷가에 늘어선 교회와 서양식 건축.
외국인이 살았던 거류지 ‘미나미야마테 히가시야마테’에 서면 바다에서 시작된 ‘나가사키’라는 도시의 역사가 보인다.
16세기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으로 개척된 나가사키는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다.
카스텔라, 어란, 비드로(유리공예), 당사(중국 사원), 용춤, 서양식 건축, 돌길….
나가사키가 이국의 정서가 넘치는 것은 오래 지속된 해외와의 교류 때문이다.
머나먼 바다를 넘어 나가사키로 온 사람 중에는 기독교를 전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새로운 신을 받아들인 나가사키에는 많은 교회가 세워져 신도들의 경건한 기도가 마을을 감싸 간다.
그러나, 기도의 힘을 두려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반천련(바테렌) 추방령을 발령.
일본 각지에서 오랜 기간 박해와 순교가 반복된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나가사키 니시자카의 언덕에서 행해진 공개 처형이다.
외국인 선교사와 일본인 신도 등 모두 26명이 순교했다.
남겨진 신도들은 이 사건 이후 잠복 기리시탄이 되어 2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은밀한 기도를 계속 올리게 된다.
19세기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자 나가사키는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했고, 무역 상인 등 외국인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거류지 ‘히가시야마테·미나미야마테’가 완성된다.
미나미야마테에서 바다를 마주하는 언덕에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은 순교한 26명에게 바치는 ‘일본 26성인 순교자 성당’으로 봉헌되었다.
그리하여 순교지인 니시자카를 향해 건축되었다.
정면에 크게 일본어로 쓰인 ‘천주당’의 글자.
일본인들도 이곳이 ‘신의 집’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하려는 이유.
그것은 ‘나가사키에 남아있는 기리시탄의 후예를 찾는다’는 큰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사키에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은 기적의 순간을 계속 기다렸다.


서양과 동양의 기법을 살린 ‘프랑스사’
큰 사명을 간직하고 신도들의 축복을 받은 그 건축의 디자인은 좀 색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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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라 천주당은 1864년 12월 29일에 준공되었다. 이듬해 1865년 2월 19일에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정면에 배치된 바로크풍 원형 장미 창문, 삼각 지붕이 있는 고딕풍의 탑옥과 첨탑에서 빛나는 금색 십자가, 건물 지붕은 기와를 올린 순수 일본풍으로, 벽에는 격자 모양으로 회반죽을 올린 ‘나마코 벽’이라는 기법이 채택됐다.
서양과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방식이 어우러진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천주당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모습과 색채를 뽐내어 사람들로부터 ‘프랑스사’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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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라 천주당 헌당식은 포교 활동을 하기 위해 파리 외국 선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선교사 지라르 신부, 퓨레 신부, 프티쟝 신부가 담당하였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아마쿠사(현재의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의 목수 고야마 히데노신.
대나무와 회반죽 등 일본에서 예로부터 쓰이던 부재와 기법이 사용된 오우라 천주당은 자금은 적었지만, 일본인의 센스가 살아있어 어떤 의미에선 색다른 건축물로 주목을 받았다.
창건 초기에는 작은 예배당이었으나 이후 신도의 증가와 대형 태풍의 영향도 있어 1879년에는 예배당을 둘러싸듯이 대규모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바닥면적도 2배가 되어, 현재와 같은 스마트한 고딕 양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때 정면에 있던 장미 창문은 예배실 오른손 측면 벽에 설치되어 창건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오우라 천주당은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도 이겨냈다.
1945년 투하된 원자탄은 순식간에 나가사키 도시를 불태웠다.
교외에 있던 천주당은 화재는 면했지만, 강렬한 폭풍으로 인해 지붕과 정면 대문, 스테인드글라스 등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기도의 등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오우라 천주당은 2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기도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곳으로 박해나 원자탄 투하의 피해를 헤쳐 나가 기도가 계속됐다.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지켜온 오우라 천주당은 현존하는 일본의 제일 오래된 가톨릭교회로 일본에 전해진 서양식 건축의 서두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1933년 국보에 지정됐다.
기도의 자유를 얻은 하느님의 집
천주당 내부에 들어서면 순식간에 장엄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하늘 높이 펼쳐진 리브 볼트 천장, 실내에 붉은색과 푸른색 부드러운 빛을 만들어 내는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
이곳이 신성한 곳임은 한 걸음만 내디디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잘 닦인 장의자에 앉아 손을 모은다.
천장으로 눈을 돌리면 대나무로 곡선을 엮어 낸 아치형 리브 볼트 천장이 펼쳐져 일본인 목수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1879년 대규모 증·개축이 이뤄졌을 때 마련된 6개의 측면 제단에는 프랑스에서 운반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 성 요셉상, 베르나르도상 그리고 성 마리아상 등이 안치돼 기도의 자유를 얻은 하느님의 집으로 많은 신도들이 방문했다.
정면에는 장식성이 풍부한 주제단이 있고, ‘십자가의 그리스도’ 상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우리를 반겨준다.
이는 1865년 천주당 헌당을 기념해 프랑스 카르멜 수도원에서 기증한 것이었다.
일본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원자탄의 폭풍으로 심하게 파손되어 현재의 것은 파리의 로제 상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천주당 내부를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1879년 개축 때의 것, 1945년 원자탄으로 크게 훼손되어 전후에 복구된 것, 그리고 1990년의 태풍 피해로 파손되어 그 후 수리된 것이 혼재해 조금씩 색감이나 투명도가 다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을 실감한 후에는 오우라 천주당 아래 잠든 프티쟝 신부를 돌아보고자 한다.
중앙 통로를 따라 주제단 앞까지 가면 우측 벽면에 끼워진 납석판비가 눈에 띈다.
이것은 오우라 천주당의 건조와 기리시탄의 후예를 발견하는 데 목숨을 건 고 프티쟝 신부의 묘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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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온 지 22년, 일본 각지에서 신학생 육성에 힘쓰며 교회당 건립에 전력을 다했던 프티쟝 신부는 가고시마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곧바로 나가사키로 되돌아갔으나, 허무하게도 1884년 10월 7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귀천하셨다.
생전의 뜻에 따라 제단 바로 아래에 잠든 신부님은 지금도 조용히 오우라 천주당을 지켜보고 있다.



마침내 이루어진 신도 발견
왜 프티쟝 신부는 오우라 천주당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종교 역사상의 기적이라 불리는 ‘신도 발견’의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1865년 2월 19일 헌당식 이후 불과 한 달 뒤인 1865년 3월 17일 정오가 지난 후 많은 참관객에 섞여 있던 우라카미 마을의 기리시탄 중 한 명이 성당 안에서 기도하는 프티쟝 신부에게 다가가 고백한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우라카미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님의 상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드디어 찾은 기리시탄의 후예.
프티쟝 신부는 프랑스에서 옮겨온 성모상으로 이들을 안내하자 우라카미 마을의 기리시탄은 “맞아, 정말 성모 마리아 님이시다! 보세요, 성자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신다”라고 기쁨에 겨워 말했다.
“성모 마리아 님의 상”이라는 말을 들은 프티쟝 신부는 기리시탄의 후예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 순간 가혹한 금교령 하에도 기독교 신앙이 계속 살아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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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선교사가 부재했던 2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라카미 마을의 기리시탄이 계속해서 믿었던 세 가지 전승이 있었다.
‘7대가 되면 신부가 로마에서 배를 타고 온다’ ‘그 신부는 독신이다’ ‘성모 마리아 님의 상을 가져 온다’. 그 예언은 이 ‘신도 발견’에 의해 현실이 되었다.
프티쟝 신부가 본 감동적인 ‘신도 발견’은 우라카미 마을 사람들이 보면 ‘신부와 마리아상의 발견’이었고 잠복 기리시탄이 진심으로 갈망했던 기도의 자유였다.
오우라 천주당에는 ‘신도 발견’을 이야기해 주는 두 개의 마리아상이 있다.
하나는 기적의 만남을 목격한 성모상이자 ‘신도 발견의 마리아상’으로 지금도 안치돼 있다.
다른 하나는 천주당 정면 입구에서 마중해 주는 ‘일본 성모상’이다.
우라카미 마을의 가난한 신도들이 미사 답례로 기부한 많은 돈의 사례금을 사용해 프티쟝 신부가 프랑스에서 들여왔다.
2세기가 넘는 긴 잠복 기간의 기도.
어려운 생활 속에서 남몰래 바라던 가족의 행복.
그리고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살아온 신도들의 삶의 모습.
자애로운 두 마리아상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오우라 천주당의 가상 투어













기도는 시간을 초월하여 교차한다
신도가 발견된 지 150년이 넘은 지금, 오우라 천주당은 세계유산이 되어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나가사키 항구를 오가는 정기선,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울창한 나무들.
아침 일찍 오란다자카 언덕길을 걸으면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오우라 천주당에서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돌길을 따라가다 보면 좁은 골목으로 헤매듯 들어서게 된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묘교지 절의 문과 오우라 스와 신사의 도리이다.
신사 불각과 교회가 이웃한 ‘기도의 삼각지대’에 서면 각자의 기도를 존중하고 서로 인정하는 관용의 마음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문화를 수용해 온 나가사키의 기질 그 자체일 것이다.
저녁이 되면 청초한 합창 소리가 들려온다.
교회의 종, 절의 종, 항구에서 메아리치는 뱃고동 소리.
이곳이 어느 나라인지조차 알 수 없을 것 같다.
나가사키는 언덕의 도시이기도 하다.
미나미야마테 언덕으로 이어지는 기넨자카의 돌계단을 오르면 조망이 아름다운 오우라 전망공원에 다다른다.
이 언덕에는 서양식 주택이 집중된 그래버원과 교회가 보존·관리되어 외국인의 생활했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히가시야마테 언덕으로 눈을 돌리면 거류지 시대부터 이어 온 미션스쿨,
각국 영사관 유적 등 서양식 건물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더위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하는 9월.
그래버원을 비롯한 거류지 일대에서 ‘나가사키 거류지 축제’가 개최된다.
테마는 ‘사람 마을 세계 거류지를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하여 세계로 이어진다’.
거류지를 사랑하는 지역 주민들이 집행위원이 되어 역사와 경관을 살린 마을 조성에 이어지도록 시작된 행사이다.
나가사키의 발전과 근대화에 온 힘을 기울인 무역 상인 토마스·그래버의 현창식이나, 그래버 언덕 오르기 대회, 밤에는 거류지의 음식점들을 걸어 다니면서 먹고 마시는 등 행사가 있어 매년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건물의 역사, 선인의 삶의 모습, 경관의 아름다움. 모든 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유산이다.
이 이벤트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거류지에 대한 사랑. 그 가치를 이해하고 전달하려는 마음이다.
“거류지는 꿈을 가진 외국인들이 이주해 도전하는 곳이었기에 젊은 사람들의 도전 무대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는 집행위원장은 젊은 사람이 이 지역에 관심를 가져 새로운 미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외국인이 살던 서양식 주택을 카페로 재활용하는 청년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땅에 옛 민가를 재생시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이주자,
거류지의 오랜 역사를 지켜봐 온 옛 수도원을 호텔로 탈바꿈시키는 사람들,
그리고 거류지의 옛날과 지금을 안내해 주는 자원봉사 가이드.
남아있는 건물들은 그곳에 살았던 선인들의 역사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새로운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서 거듭나려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소중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웃을 생각하는 경건한 기도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바람도, 변함없는 풍경도 지금 사는 사람들의 손에 계승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매달 마지막 목요일, 나가사키 거류지의 일각에 있는 회의실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
지역 주민이나 역사적 건조물의 소유자, 관광 시설의 관리자, 교육 관계자, 행정 관계자 등이 모이는 나가사키 거류지 역사 마을 조성 협의회 모임이다.
나가사키 거류지에 관련된 다양한 멤버가 서로 배우고, 이야기하고,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냉정하게 이 마을의 미래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협의회와 행정이 힘을 합쳐 책정한 나가사키 거류지 역사 마을 그랜드 디자인과 실행 계획은 마을 조성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바이블이다.
이 지역의 역사를 살린 마을 조성 활동이 미래의 역사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역사 도시 조성
전국 각지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성과 신사 불각이 있으며, 그 주변 시가지에는 선인들이 형성한 마치야와 무가 저택 등 역사적인 거리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한 지역에서는 축제나 전통 행사 등 옛사람들의 삶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역사적인 거리 모습과 일체가 되어 고유의 운치와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풍치를 우리는 지키고 가꾸어 후세에 계승해 나갈 필요가 있다.
나가사키시는 오래전부터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역사 문화를 키워 왔다. 에도막부 말기 이후는 일본의 근대화를 지지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 발자취를 지금까지 전해주는 지역의 자산을 지켜나가기 위해 2020년 나가사키시는 ‘역사 도시 조성 계획’을 책정해 국가의 인정을 받아 관계 부처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민과 행정이 협동한 도시 조성에 힘쓰고 있다.
이국정서나 문화·시대의 혼성을 짙게 나타내는 나가사키 거류지의 역사·문화를 담은 ‘히가시야마테·미나미야마테 구역’도 그중의 하나. 역사적 자산을 활용한 번화와 삶이 공생할 수 있는 도시 조성을 추진하여 거류지로서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고 있다.
나가사키 거류지의 해외 교류로 보는 역사적 풍치
- 10.오란다자카